어김없이 돌아온 10월의 축제.
신의 손은 못되어도 발뒷꿈치 정도는 되는지라 올해 유독 말썽이었던 예매 사이트의 서버를 뚫고
보고 싶었던 영화들의 티켓을 대부분 구했다. 문제는 시간과 체력.
지인들과의 약속 새끼줄이 꼬이면서 힘들게 예매했던 인기작, GV 티켓들이 사라락 날아가버린 건 안타까웠지만
영화 보는 데에만 열중하느라 내가 영화를 보는 건지, 내가 영화를 찍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피곤에 지쳐서
종내에는 뭘 봤는지 기억도 잘 안 날 정도로 꾸벅꾸벅 졸아댔던 거에 비하면 중간에 쉴 틈을 주는 것이 더 좋았다.
그 덕에 센텀으로 몰았던지라 가 볼 일 없을 뻔 했던 남포동 PIFF 광장 구경도 하고 나보다도 더 모르는 자봉 수준에
한숨 쉬며 항의할까 하다가 피곤해서 관두고 제법 괜찮은 음식 내놓는 쉬폰 가서 스테이크도 썰고 파스타도 들이마셨다.
후식-_-으로는 조개구이에 홍합탕, 맥주도 위장에 퍼부었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여.
영화는 내내 센텀(C 모 멀티 플렉스)에서 봤다.
집에서 제일 가깝고 급행 좌석 버스가 있다는 게 좋았는데 백화점 화장실 깔끔한 거 빼면 삭막하고 지나치게 세련된
동네라 촌스러운 나랑은 좀 안 어울렸달까. 영화제만의 좀 후줄근하고 복작거리며 시끌시끌한 느낌이 없어서인지
자주 가는 동네임에도 여전히 정은 안 붙었다. 백화점 세일 기간이랑 겹치니 고가의 백 든 사모님들은 많더라만.
이래저래 광클하면서 취소표도 줍고 욕심 좀 부렸더니 보고 싶은 영화들이 겹쳐서 양 손에 떡을 쥐고 주물거리다 결국은
개봉 확정된 작품을 포기하고 양도했는데 정작 내가 선택한 영화 보러 입장할 때 이 영화 개봉하니까 관심 가져주세요라며
나눠주는 엽서에 살짝 좌절할 뻔 Orz. 뭐 그래도 주인공들이 레알 미남이었기 때문에 괜찮았다. (
티켓 양도하면서 영화제 와서 혼자 여러 작품들 보는 사람치고 제대로 끼니 때우는 사람이 없다 싶어 껌 사면서 같이 산
쵸코바를 내밀었다. 나보다는 어릴 것 같았던 복학생 느낌의, 잘 깎은 밤같이 생긴 청년이 받으면서 피식 웃길래 뭐야 되게 이상했나 괜히 줬나 나나 먹을걸 후회하다가 나중에 영화 잘 봤다고 쵸코바 고마웠다던 문자 받고 무리수는 아니었구나 한숨;
영화제에서 영화만 보고 축제는 거의 못/안 즐기는 내가 올해 해운대를 못볼 뻔 했는데 그래도 용케 들렀다.
야외 상영작을 보기로 예정되었던 터라 피로감 느낄 때까지 마구 걸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스리슬쩍
산책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그래도 영화'제'의 냄새를 조금은 맡았지.
바쁜 일정 속에 남포동-해운대를 오가느라 퀵서비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다던 일화를 옮겨온 애니메이션 트레일러 속에
수줍은 볼을 하고 등장하셨던 올해가 마지막인 김동호 집행위원장님. PIFF의 마스코트였던 분. 영화제 환영 인사도 없고 정시
입장도 완화되어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그 짧은 트레일러가 스크린을 흐르는 동안만큼은 참 평안하고 기뻤다. 감사해요.
대세는 영리한 전화기라는 게 피프 빌리지에서도 여실히 느껴졌다.
다음존에서는 엔제... 커피도 무료 제공했는데 난 여기 커피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별다방 갔지.
해수욕장 밖의 인도를 수놓은 영화제 출품작 포스터들...
이 거리를 걸으면 축제 기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지.
다른 영화들을 포기하면서도 조금 덜 끌리는, 오픈 시네마를 그래도 꼭 한 편씩은 보게 되는 이유는 추위에 달달 떨면서
불편한 의자에 뒤틀리는 허리를 감수하고서라도 느낄 수 있는 낭만, 뭐 그런 것. 전용 상영관이 완공됨에 따라서 올해를
마지막으로 요트 경기장에서의 상영도 막을 내린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이런 저런 애로 사항이 많았던만큼 불가피한 일이
겠지만 조금은 번잡하고 피곤했던 이 시간들이 좋은 추억이 되었고 차곡차곡 쌓여왔다는 것만큼은 변함이 없겠지.
여차저차한 사정과 컨디션 난조로 인해서 예매해놓고도 부득이하게 놓친 영화들 때문에 이마에 주름지어가며 서운해했던
것을 단박에 날려준 올해의 영화가 될 한 편. 어쩌면 기가 막혀서 더 뻔한 이야기, 꼭 그 시절이 아니어도 어느 나라, 어느 땅,
어느 민족에게 있었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너무 젖어들지 않게 잘 그려낸 작품. 놓쳤더라면 진짜 아쉬웠을 거야.
GV 진행하러 들어온 전찬일 프로그래머가 입에 침을 튀겨가며 칭찬하는 것이 거슬리지 않았던 것이 내 맘도 그랬거든.
거기다 시차, 제2의 언어(영어)가 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화에 대해서 진지하고 성실하게 한 마디씩 꺼내놓는 감독을 보면서 내가 이 영화에 가지고 있는 좋은 감정을 더욱 배가시키고 영화에 대한 진솔한 믿음을 갖게 해주었지. 이런 사람이
만든 영화니까 괜찮을거야라는 뭐 그런 느낌. 유명한 감독, 영화배우들을 마주쳐도 지나쳐가던 내가 상영관 복도에 줄 지어서서 제대로 된 사인을 받기 위해 티켓 밑에 다이어리를 받치고 손 달달 떨며 기다리게 만든 드니 빌뇌브 감독. (심지어 훈남이야)
전찬일 씨 바람처럼 개봉해서 좀 더 많은 이들이 봤으면 좋겠다. 드니♡ (
올해는 백화점에 반쯤 갇히다시피 한 상태로 잔치를 즐긴 터라 데일리도 제대로 못 챙기고 제대로 된 행사 한 번 본 적
없지만 그래도 내 가을을 행복하게, 풍성하게 만든 일주일이라는 건 여전하다. 고른 영화들도 다 수준 이상이었고.
하필 딱 영화제 앞두고 카메라가 말썽을 부려서 사진은 죄다 손에 익지 않은 전화기로 막 찍은 거라는 게 아쉬울 따름.
포스트 김동호의 PIFF가 어떤 식으로 나아갈지 기대도, 걱정도 되지만 또 내년 9월 즈음이면 설레이기 시작하겠지.
조금씩 체력도 달리고 버겁기 시작하지만 즐길 수 있을 때 열심히 놀자.
즐거웠어. 내년에 만나.
안녕 내 가을.
Posted by Tired S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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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클님 후기 보니.. 김동호 위원장님이 마련하신 마지막 축제..인데, 무리해서라도 ..가볼까 후회가 밀려 오네요.
2010.10.20 03:17 [ ADDR : EDIT/ DEL : REPLY ]아쉬워서 ..진짜 눈물이 찔끔; 처음 피프 시작할 때 생각하면, 변하지 않고 꾸준히 그 곳에서
축제가 열리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고 그렇습니다- 그을린은 제발 개봉을 ㅠ_ㅠ
해변가 사진 보니, 저번에 부산 갔을 때.. 일출 기다리며 산책하던 것도 생각나고 ㅠ_ㅠ
아무래도 올해가 가기 전에 부산 한번 더 가야 할까봐요.. 홍콩병;에 이어 부산병이라니.. -_ -;;
처음 시작할 때 생각하면 진짜 감개무량이죠.
2010.10.30 02:39 신고 [ ADDR : EDIT/ DEL ]이만큼 성대한 잔치가 된 데에 가장 큰 일 하신 분이 김동호 위원장님이신데...
아 트윗에서 보니까 무릎팍 녹화하셨다네요. 꺄아 완전 기대 >_<)/
해운대가 좀 금해-_-증상을 부르는 동네긴 합니다.
오세요 오세요.
지난 번에 못 갔던 밀면집 드디어 제가 위치를 알아냈어요!! ㅋㅋ
이번에 오시면 제가 뫼시고... 아, 이 계절엔 좀 추우려나?
뭐 어때요 근성으로 밀면을 철근같이 씹ㅇ... (네 짜질게요 <-)
와 부러움! 덕분에 사진 잘봤어 사진 예쁘다 오오.. 요새 영화제 현장도 참 깔끔한 느낌
2010.10.20 14:39 [ ADDR : EDIT/ DEL : REPLY ]..'ㅁ; 그리고 그리움!!
많이 세련되졌지.
2010.10.30 02:40 신고 [ ADDR : EDIT/ DEL ]그래서 적응이 잘 안돼 ㅋㅋ
아, 이게 카메라 어플 조작이 서툴러서 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배울 생각은 전무하고 <-)
바쁘고 정신없었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시간이었죠.
2010.10.23 23:4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네.
2010.10.30 02:40 신고 [ ADDR : EDIT/ DEL ]후유증 생길만큼요.